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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은 후삼국 시대에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 전쟁터에서 많은 공을 세웠고, 918년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국왕이 됐습니다. 그는 국호를 '고려'로 바꿨고,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했습니다. 여기에는 행운도 따랐습니다. 935년에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자 왕건에거 투항했고, 그해 가을에 경순왕이 스스로 신라를 넘겨주었으니까요. 후백 제나 신라의 경우 왕건이 강제로 점령한 게 아니었으므로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공이외다."
왕건은 혼자 독차지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귀순한 견훤과 경순왕을 잘 챙겨 줌은 물론 자신의 부하들에게 많은 상을 내렸습니다. 왕건은 신하들에게 성을 하사해서 특별한 기분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를테면 왕건은 신라 사람 김행에게 권능이 많다 하여 권씨 성을 주었습니다.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고려 개국 공신 신숭경 • 복지겸.홍유·배현경 등도 처음에는 성이 없었습니다. 각기 삼능산•복사귀· 홍술•백옥삼으로 불렸던 이들은 성을 하사받음으로써 신술겸은 평산 신씨, 충남 당진 면천 출신인 복지겸은 면천 복씨, 홍유는 의성 홍씨, 배현경은 경주 배씨의 시조가 됐습니다. 권행은 안동 권씨의 시조입니다.
왕건은 940년 전국 각 지역의 유력한 토착 호족들에게 특정한 성씨를 하사했으며, 출신지를 본관으로 지정했습니다. 따라서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성을 썼으며, 고려 문종은 '성씨 없는 사람은 과거 시험을 볼 수 없다.'는 법령을 반포함으로써 성씨 제도를 확실히 굳혔습니다. 우리나라 성씨 대부분이 고려 초기의 인물을 시조로 삼는 경우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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