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못생겼네!" 강감찬(948~1041)은 외모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습니다. 에 '몸집이 작고 인물이 못났다.'라고 적혀 있거든요. 하지만 두뇌가 뛰어난 강감찬은 책 읽기를 무척 좋아했으며 틈틈이 무예를 닦아 문무를 모두 갖추려 노력했습니다. 강감찬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35세에 장원 급제 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70세 때인 1018년 위기에 빠진 고려를 구했습니다. 1010년 쳐들어왔다가 물러간 거란이 다시 고려를 쳐들어온 것입니다. "이놈들이 우리를 얕잡아 보는구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 등과 함께 곳곳에서 거란군을 격파했습니다. 압록강 근처 홍화진 전투에서는 1만 2000여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당황한 적군을 단숨에 무찌르는 전략을 썼습니다. 이때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
서기 993년(성종 12), 고려에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거란 군사 책임자 소손녕은 봉산군을 점령한 다음 고려에 문서를 보내 무릎을 꿇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고려의 여러 신하는 두려움에 떨며 빨리 항복 문서를 보내어 일부 땅을 내주고 나머지 국토를 지키자고 말했습니다. 이때 서희(942~998)가 다른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의 군사력이 우세함만 보고 서경 이북 땅을 떼어 주는 것은 묘책이 아닙니다. 또 삼각산 이북도 고구려 옛 땅인데 저들이 계속 욕심을 부려 요구한다며 그마저 주시겠나이까?" "......." 성종은 여러 대신보다 서희의 말을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여 서희를 중군사로 명하고 시중 문하시량 최량과 더불어 군대를 이끌고 북쪽 국경에 주둔하며 평안도를 방비하게 했습니다. 서희는 전투태세..
"시험을 쳐서 인재를 뽑으십시오." 서기 958년, 고려 광종은 중국 후주에서 귀화해 온 쌍기의 건의에 따라 처음으로 과거 제도를 시행했습니다. 광종은 왜 과거제 제안을 반색하며 즉각 받아들였을까요? 고려는 건국할 때 여러 신하의 도움을 받았고 지방 호족과 협력하면서 왕조를 유지했습니다. 하여 그들을 대우해 줘야 했기에 공신과 호족의 자손들에게도 벼슬을 내려 주었습니다. 이들은 부모 덕분에 손쉽게 벼슬을 해서인지 국왕을 그다지 어렵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굳이 공부할 필요가 없네. 아버지 덕분에 벼슬할 수 있으니." 제4대 국왕 광종은 그 점을 못마땅하게 여겨 호시탐탐 왕권 강화책을 생각했는데 쌍기의 말을 듣는 순간 '옮거니!' 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에게 기회를 준다는 명분도 좋았고, 실제로 왕권 강..
왕건은 지방 호족의 딸들과 결혼하여 친분 관계를 두텁게 하면서 나라를 안정시켰습니다. 개국 공신과 지방 호족에게는 다양한 성을 주어 특별한 권위 의식을 가지게 했습니다. 덕분에 고려는 빠르게 안정되었습니다. 그리고 943년 4월, 왕건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후대 임금이 지켜야 할 열 가지 교훈을 남겼습니다. '훈요십조'로 불리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불교를 숭상하되, 사원의 폐단을 엄단하라. 사원을 함부로 짓지 마라. 장자가 왕위 계승을 하되, 어질지 못하면 신망 있는 자에게 정통을 잇게 하라. 고려의 특성에 맞게 예약을 발전시켜라. 지맥의 근본인 서경을 중시하여라. 연등과 팔관 등을 소홀히 하지 마라.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라. 차령 이남 금강 밖 지방은 산세가 거꾸로 달려 ..
왕건은 후삼국 시대에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 전쟁터에서 많은 공을 세웠고, 918년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국왕이 됐습니다. 그는 국호를 '고려'로 바꿨고,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했습니다. 여기에는 행운도 따랐습니다. 935년에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자 왕건에거 투항했고, 그해 가을에 경순왕이 스스로 신라를 넘겨주었으니까요. 후백 제나 신라의 경우 왕건이 강제로 점령한 게 아니었으므로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공이외다." 왕건은 혼자 독차지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귀순한 견훤과 경순왕을 잘 챙겨 줌은 물론 자신의 부하들에게 많은 상을 내렸습니다. 왕건은 신하들에게 성을 하사해서 특별한 기분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를테면 왕건은 신라 사람 김행에게 권능이 많다 하여 권씨 성을 주었습니다. " ..
10세기 초, 한반도 상황은 몹시 어지러웠습니다. 서남쪽에서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중북부에서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워 신라에 대항했기 때문입니다. 후고구려는 왕건에 의해 고려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신라에게는 여전히 골치 아픈 존재였습니다. "국왕이 별거 아니네." 국왕 권력이 약해진 틈을 타 지방 호족들은 독자 세력을 형성하며 자기만의 실질적 왕국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다 927년에는 견훤이 신라 수도 경주를 점령한 다음, 경애왕을 죽이고 경애왕의 이종 6촌 동생인 김부를 새로운 국왕으로 삼았습니다. 제56대 군주 경순왕이 그렇게 허약한 모습 으로 왕위에 올랐으니 한마디로 신라는 허울뿐인 나라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를 어찌하나." 경순왕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습니다. 연일 전쟁으로 인해 땅은 피로 물들..
"황제를 몰아내자!" 9세기 말엽 당나라에 큰 난리가 일어났습니다. 소금 장사를 하던 왕선지와 황소가 당나라 정부에 대한 불만 세력을 모아 난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당나라는 상인에게 지나치게 많은 세금을 부과하였고, 때마침 흉년이 들어 백성 역시 불만이 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거기에 호응하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왕선지가 토벌군과의 전투에서 죽은 뒤에는, 황소가 무리를 이끌며 무서운 기세로 도읍지 장안성을 향해 쳐들어갔습니다. 당나라 황제 희종은 고변을 시켜서 반란구을 제압하라고 명했습니다. 고변은 고구려 출신 장군으로 당나라로 귀화한 고순문의 손자였습니다. 고변은 신라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과거에 급제한 최치원을 불러 종사관으로 삼았습니다. 최치원은 토철군을 따라다니며 이러저..
"활을 참 잘 쏘네!" 신라 시대 때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궁복'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어려서부터 무예가 뛰어났고 물에 익숙하였으며, 신분을 뛰어넘어 무언가를 달성하려는 야망이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 무렵 신라에서는 신분 제도로 인해 평민은 높은 지위류 올라설 수 없었습니다. "당나라로 가서 크게 성공하자!" 그는 희망찬 꿈을 안고 당나라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도착해보니 귀족층만 성을 사용하는 신라 사람과 달리 중국 사람들은 모두 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궁복은 자신도 성을 갖기로 마음먹고는, 자기 이름 첫 글자 궁과 중국에서 제일 흔한 장씨를 합쳐 성을 장씨라 하였으며, 복 자의 소리를 늘여서 이름을 보고로 바꿨습니다. 이때부터 궁복은 ..
당나라는 고구려를 별망시킨 뒤, 분산정책을 펼쳤습니다. 고구려인이 뭉쳐서 다시 도전해 올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당나라 정부는 고구려인 3만여 가구를 요하 서쪽으로 옮겨 살게 했습니다. 대조영 가족도 거기에 끼여 있었습니다. 대조영은 속으로 결심했습니다. '분하다. 하지만 반드시 고구려인의 강한 기질을 보여 줄 거야.' 당시 요하 서쪽 지방에는 거란족이 당나랑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거란족도 당나라에게 불만을 가졌습니다. 서기 696년,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민심이 더 나빠지자 거란족 추장 이진충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해 10월 당나라는 토벌군을 보내어 이진충을 죽였지만, 다른 거란족 추장이 반항을 계속하며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이로 인해 나라가 온통 시끄러워졌습..
" 너희는 절대로 벼슬을 탐내어 서로 다투지 마라. 서로 반목하여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돼서는 안 된다." 서기 665년, 연개소문이 죽기 전에 아들 삼 형제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연개소문에게는 남생, 남건, 남산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사이가 나쁨을 잘 알기에 위와 같이 말한 것입니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 남생은 대막리지가 되어 고구려의 실질적 통치자로 나섰습니다. 그러자 고위직에 있던 둘째 남건이 그런 형을 질투하며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나도 최고 권력자가 되고 싶어.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남생이 지방을 둘러보러 성을 비운 사이, 남건이 일을 벌였습니다. 남생의 아들을 죽이고 자신이 대막리지로 올라선 것입니다. 지방에서 그 소식을 들은 남생은 크게 분노하여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