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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못생겼네!"
강감찬(948~1041)은 외모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습니다. <고려사>에 '몸집이 작고 인물이 못났다.'라고 적혀 있거든요. 하지만 두뇌가 뛰어난 강감찬은 책 읽기를 무척 좋아했으며 틈틈이 무예를 닦아 문무를 모두 갖추려 노력했습니다.
강감찬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35세에 장원 급제 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70세 때인 1018년 위기에 빠진 고려를 구했습니다. 1010년 쳐들어왔다가 물러간 거란이 다시 고려를 쳐들어온 것입니다.
"이놈들이 우리를 얕잡아 보는구나!"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 등과 함께 곳곳에서 거란군을 격파했습니다. 압록강 근처 홍화진 전투에서는 1만 2000여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당황한 적군을 단숨에 무찌르는 전략을 썼습니다. 이때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물막이를 터뜨려 적군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해서 적군 1만여 명을 죽였습니다.
거란군 장군 소배압은 그래도 개경을 향해 쳐들어갔다가 또다시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배고파, 너무 배고파."
"갈증 나서 못 참겠어. 물을 마시고 싶어."
고려가 미리 우물을 메워 물을 구하기 어렵도록 하는 한편 식량을 성안으로 옮겼기에 그랬습니다. 목마르고 배고프니 자연스레 싸울 의욕이 없어졌습니다. 그걸 노린 고려군은 갑자기 공격하는 기습 작전을 펼쳐 거란군을 괴롭혔고, 견디다 못한 소배압은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고려군은 도망가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구주에서 적을 모조리 무찔렀습니다. 매복 공격 전술로 아군 피해는 극히 적은 반면 침략군은 10만 명 중에서 겨우 수천 명만 살아 도망갔습니다.
고려도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많은 민간인이 죽거나 다쳤고 거란군의 행패에 의해 귀중한 문화재들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고려는 국가적 자존심을 지키면서 실리를 챙겼습니다. 그해 여름부터 고려와 거란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면서 평화적 국교 관계를 맺었거든요. 거란이 고려를 쉽게 넘보지 못하도록 강한 모습을 보인 덕분입니다.
"와, 와! 강감찬 장군이시다!"
고려군이 거란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날, 백성들은 구세주를 만난 듯이 강감찬 장군을 맞이했습니다. 임금은 친히 영파역까지 나와 강감찬 장군 머리에 황금으로 만든 꽃가지를 꽂아 주었으며 왼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술잔을 들어 권하면서 공로를 칭찬했습니다.
"정말 수고하였소, 공의 노고로 이 나라가 큰 위기를 넘겼소."
"황공하옵니다."
이제부터는 누가 봐도 강감찬의 전성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강감찬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현종은 계속 곁에 있어 달라며 말렸지만 강감찬은 70세 늙은 나이를 들어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지나친 권력이 나중에 시기심 어린 재앙을 부를 가능성이 높음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장군님! 못된 귀신을 물리쳐 주소서!"
한편 홍화진에서의 기발한 몰살 전략과 구주 대첩 대승으로 인해 강감찬은 백성에게 신화적 영웅이 됐고, 무속 신앙의 신으로까지 숭배되었습니다. 적군을 섬멸했듯 잡귀와 액운을 물리쳐 주리라는 기대감에 수많은 무당이 강감찬을 신으로 모신 것입니다. 조선 시대에 강감찬 영정이 무속 신앙에서 단연 최고 인기를 끈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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