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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29년 가을, 김유신은 아버지 김서현을 따라 고구려의 낭비성 공격에 나섰습니다. 낭비성은 철원에서 서울로 가는 중요한 길목(지금의 포천)에 있는 반달 모양의 성으로, 우뚝 솟은 곳에 있어서 사방을 내려다볼 수 있었습니다. 본래는 신라가 고구려의 공격을 막고자 세운 성이었으나 고구려에게 빼앗겨 오히러 한강 지역을 위협받았습니다. 하여 신라는 꼭 그 성을 되찾고 싶어 했습니다. 신라군은 지휘관 김용춘의 지휘 아래 성을 공격했습니다.
"진격하라!"
"성에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아라!"
성 밖으로 나와 목책 안에서 대기하던 고구려군은 신라군을 간단히 물리쳤습니다
신라 병사의 전열이 흐트러지자, 고구려 병사들이 목책 밖으로 나와 신라 병사들을 마구 죽였습니다. 신라군은 사기가 꺾인 채 싸울 의지를 버리며 점차 무너져 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김유신이 아버지 김서현 장군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군서거 패했습니다. 제가 평생 충효를 갖고 살겠다고 기약했으니, 전쟁에 임해 용기를 내겠습니다."
김유신은 말을 탄 채 휘하 직속 기병들을 데리고 과감하게 적진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고구려군은 예상치 못한 반격이 당황해했고, 김유신은 순식간에 고구려 장수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신라군은 용기를 얻어다시 힘내어 싸움에 나섰습니다. 함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신라군의 기세에 눌렸는지 고구려 병사들은 성안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성문이 좁아 한꺼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신라군은 고구려 병사 5000여 명을 죽였고, 1000여 명을 포로로 사로잡았습니다. 그러자 성안에 남아 있던 고구려 병사들아 항복했습니다.
이 전투로 인해 김유신은 자신의 이름을 비로소 신라 왕실에 분명히 알릴 수 있게 됐습니다. 평균 수명이 40세이던 시절에 김유신은 만 34세 나이에 뒤늦게 무공을 인정받은 것이며, 이후 신라에서 가장 비중 있는 장수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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