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요하를 건너서 숙군성을 쳐라"
서기 402년에 고구려 제19대 군주 광개토 태왕은 위와 같이 명령했습니다. 342년에 연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미천왕(고구려 제15대 군주) 왕릉을 도굴하여 그 시신을 가져간 일과, 400년에 후연이 고구려 신성과 남소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일에 대한 복수의 시작이었습니다. 고국원왕(고구려 제16대 군주)이 343년에 많은 공물을 바치고 미천왕 시신을 돌려받았지만, 광개토 태왕은 어릴 때부터 그 치욕을 반드시 갚겠노라고 작심했었습니다.
"숙군성은 후연의 수도와 가까운 곳에 있어 공격이 어렵습니다."
"수군을 활용하라!"
광개토 태왕은 오랫동안 참고 준비해 온 치밀한 전략을 바탕으로 육군과 수군의 동시 출동을 결정했습니다. 그 무렵 후연은 고구려군에 맞서고자 북쪽에 군대를 집중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 기병 부대가 후연을 공격하려면 요하(만주 남부를 흐르는 강)를 피해 북쪽으로 돌아서 가야하거든요, 광개토 태왕은 일반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수군으로 적의 심장을 공격하는 대담함을 보였습니다. 작전은 성공했고, 고구려는 숙군성을 점령했습니다.
이 전투를 계기로 고구려는 만주 지역의 강대국으로 등장했습니다. 이후 후연이 반격해 왔지만 몇 차례 공방을 거쳐 고구려가 요동성마저 차지했으니까요. 광개토 태왕은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고구려를 넘보지 못하리라!"
광개토 태왕은 남쪽으로는 백제를 제압하고, 북서쪽으로는 중국을 누르며 고구려 최대 영토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64개 성과 1400개 마을을 차지했습니다. '전쟁의 신'이라고 불려도 손색없을 정도의 성과였습니다.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효, 해골을 보고 깨우침을 얻다 (0) | 2020.04.03 |
---|---|
계백, 황산벌에서 죽음으로 맞서다 (0) | 2020.03.15 |
연개소문, 쿠데타를 일으키다 (0) | 2020.03.13 |
김유신, 낭비성 전투에서 이름을 비로소 알리다 (0) | 2020.03.09 |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 (0) | 2020.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