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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을 다루기가 어려운데 좋은 방법이 없겠소?"
"연개소문을 죽여야 합니다."
"음, 어떻게?"
"천리 장성 쌓는 걸 감독하라고 내보낸 다음 기회를 보지요."
서기 642년 가을의 어느 날, 고구려 영류왕과 대신들은 연개소문을 없애고자 비밀리에 논의했습니다. 당시 영류왕을 비롯한 대부분의 귀족이 중국에 대해 온건한 정책을 추구한 데 비해, 연개소문은 강경한 대응책을 주장해서 자주 마찰을 겪였습니다. 체격 당당하고 성격 강직한 연개소문은 좀처럼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그럴수록 국왕과 귀족들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고구려 수도 평양성 남쪽에서 대대적인 군사 사열식이 벌어졌습니다. 연개소문이 주관하는 자리였고, 주요 대신들이 빠짐없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연개소문은 이 행사를 마치고 천리 장성 축조를 감독하기 위해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귀족들은 연개소문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마지못해 행사장으로 갔습니다.
연개소문은 초대한 사람이 모두 참석했음을 확인하고는 행사를 진행시킴과 동시에 부하들에게 은밀한 신호를 보냈습니다. 기다렷던 부하들은 일제히 귀빈석으로 달려가서 100여 명에 이르는 귀족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리고 궁궐로 가서 영류왕마저 죽였습니다.
"악!"
어째서 이런 일이 벌여졌을까요? 연개소문은 영류왕이 다른 귀족들과 모의하여 자기를 죽이려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습니다. 멀리 변방으로 떠나면 돌아오기 힘들고, 너느 순간 암살당할 것 같은 불길한 미래를 상상하게 되자 쿠데타(힘으로 정권을 뺏는 일)를 결심했습니다. 연개소문이 군사 사열식을 빙자해 주요 대신들을 초대하여 죽인 연유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장수들은 왜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가담했을까요? 그 이유는 영류왕의 유약한 대외 정책에 있습니다. 영류왕은 640년 당나라에 태자를 사신으로 보내며 친하게 지내자는 뜻을 나타냈습니다. 당나라는 겉으로 고구려에게 사이좋게 대하면서 몰래 전쟁 준비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고구려 장수들은 그런 영류왕에게 불만을 가졌고,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동조하게 된 것입니다.
"고구려는 결코 나약한 나라가 아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보장왕)를 제28대 국왕으로 옹립한 뒤, 최고 관직인 대막리지가 되어 실질적으로 고구려를 다스렸습니다. 연개소문은 신라를 공격하여 여러 성을 빼앗았고, 신라의 요청을 받아 당나라에서 보낸 사신을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우리 고구려는 너희 당나라의 지시를 받는 나라가 아니다!"
당나라 태종이 화를 내며 고구려 침공에 나서서 645년 안시성까지 진격했으나, 연개소문은 당나라 군대의 보급로를 끊으며 반격해 물리쳤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친 당나라 공격을 잘 막아 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려 했습니다.
연개소문은 23년 동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다가 665년에 죽었습니다.
그가 죽은 뒤, 중국에서는 연개소문을 포악한 인물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심지어 '말에 오르내릴 때는 항상 사람을 발판으로 삼았다.'고 써서 나쁜 성격을 강조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맞는 말이지만, 그보다는 왜곡된 게 더 많습니다. 한 예를 들면 연개소문은 말에 올라탈 때마다 당나라 포로의 등을 밟으며 당나라에게 이기겠다는 의지를 다졌습니다. 중국 측에서는 그걸 불쾌하게 여겨 연개소문을 안하무인의 흉악한 인물로 묘사했고, 신라에서는 그걸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중국이나 신라는 연개소문을 무척 두려워했다는 뜻입니다.
연개소문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중국 전통 경극에서 연개소문이 오랫동안 신기에 가까운 무술을 지닌 장수로 등장한 데서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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