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617~686)는 신라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 화랑으로 활동했습니다. '화랑'은 왕과 귀족의 자제들로 이루어진 청소년 심신 수련 조직인데, 원효는 뛰어난 기억력과 총명함으로 집안의 기대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살아야 할 이유와 목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원효는 출가하여 스님이 되고자 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원효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말렸으나, 원효는 형이 있으니 자신의 뜻을 들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결국 집안의 허락을 받은 후 원효는 스님이 되어 여러 절을 다니며 부처의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원효는 그런 시간을 통해 불교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았지만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 불교를 전해 준 당나..
"참으로 미안하오. 그러나 우리의 운명이니 받아들이시오" 서기 660년 7월 초, 백제의 계백 장군은 출정에 앞서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칼로 베어 죽였습니다. 백제 군사보다 열 배 이상 되는 신라 군대에 맞서기 위해서는 죽음을 무릅써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계백은 황산벌에 진영을 갖추고 5000 결사대에게 말했습니다. "월나라 왕 구천은 5000 군사만으로 오나라 70만 군사를 격파한 일이 있노라. 우리도 용기를 다해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7월 9일, 신라 5만 대군이 황산벌에 도착함에 따라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백제는 수적으로 매우 불리했지만 강인한 정신력을 발휘하여 신라에게 밀리지 않았습니다. 이틀에 걸쳐 네 차례 큰 싸움이 벌어졌으나 백제가 모두 이겼습니다. 그러자 신라군 지..
서기 629년 가을, 김유신은 아버지 김서현을 따라 고구려의 낭비성 공격에 나섰습니다. 낭비성은 철원에서 서울로 가는 중요한 길목(지금의 포천)에 있는 반달 모양의 성으로, 우뚝 솟은 곳에 있어서 사방을 내려다볼 수 있었습니다. 본래는 신라가 고구려의 공격을 막고자 세운 성이었으나 고구려에게 빼앗겨 오히러 한강 지역을 위협받았습니다. 하여 신라는 꼭 그 성을 되찾고 싶어 했습니다. 신라군은 지휘관 김용춘의 지휘 아래 성을 공격했습니다. "진격하라!" "성에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아라!" 성 밖으로 나와 목책 안에서 대기하던 고구려군은 신라군을 간단히 물리쳤습니다 신라 병사의 전열이 흐트러지자, 고구려 병사들이 목책 밖으로 나와 신라 병사들을 마구 죽였습니다. 신라군은 사기가 꺾인 채 싸울 의지를 버리며 점..
"지금 천하가 모두 우리를 받드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그렇지 않다. 더구나 고구려 백성들은 호족(지방 세력가)들의 탄압에 신음하고 대가 없는 힘든 일에 시달리며 괴로워하고 있다. 내가 친히 전군을 통솔하여 하늘의 뜻에 따라 나아갈 것이다." 서기 612년(고구려 영양왕 23)에 수나라 양제는 위와 같은 명분을 내걸고 고구려 정벌에 나섰습니다. 수나라는 고구려 정치에 간섭할 위치에 있지 않건만 천하 통일의 야욕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말이었지요. 수양제는 전투군 100여만 명에, 군량 보급 부대 200만 명이 넘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원정군을 이끌었습니다. 워낙 병력이 많은 탓에 날마다 한 부대씩 40일 동안 출발해야 했습니다. 수양제는 따로 수군 10만 명을 3000척에 이르는 배에 태워 보내며 평양성에서 ..
"공격하라!" 서기 551년 봄, 백제 성왕은 신라 및 가야 군대와 더불어 고구려가 지키는 한강 유역을 공격했습니다. 그 무렵 고구려는 밖으로는 북쪽 돌궐로부터 위협받고, 안으로는 귀족들끼리 권력 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 남쪽 연합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자 고구려는 힘없이 땅을 뺏겼습니다. 신라는 한강 상류 지역을, 백제는 한강 하류 지역을 각각 차지했습니다. "드디어 한강을 되찾았노라!" 백제 성왕은 한강을 굽어보며 무척이나 감격해했습니다. 신라에게 상류지역 열 개 군을 양보하여 내주었으므로 실질적으로 한강을 전부 차지한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왕은 어찌하여 기뻐했을까요? 그 이유는 백제의 건국과 관련 있습니다. 일찍이 백제는 한강 유역에 터를 잡고 나라를 세웠으니까요. 백제는 물이 풍부하고 넓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