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미안하오. 그러나 우리의 운명이니 받아들이시오" 서기 660년 7월 초, 백제의 계백 장군은 출정에 앞서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칼로 베어 죽였습니다. 백제 군사보다 열 배 이상 되는 신라 군대에 맞서기 위해서는 죽음을 무릅써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계백은 황산벌에 진영을 갖추고 5000 결사대에게 말했습니다. "월나라 왕 구천은 5000 군사만으로 오나라 70만 군사를 격파한 일이 있노라. 우리도 용기를 다해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7월 9일, 신라 5만 대군이 황산벌에 도착함에 따라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백제는 수적으로 매우 불리했지만 강인한 정신력을 발휘하여 신라에게 밀리지 않았습니다. 이틀에 걸쳐 네 차례 큰 싸움이 벌어졌으나 백제가 모두 이겼습니다. 그러자 신라군 지..
" 요하를 건너서 숙군성을 쳐라" 서기 402년에 고구려 제19대 군주 광개토 태왕은 위와 같이 명령했습니다. 342년에 연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미천왕(고구려 제15대 군주) 왕릉을 도굴하여 그 시신을 가져간 일과, 400년에 후연이 고구려 신성과 남소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일에 대한 복수의 시작이었습니다. 고국원왕(고구려 제16대 군주)이 343년에 많은 공물을 바치고 미천왕 시신을 돌려받았지만, 광개토 태왕은 어릴 때부터 그 치욕을 반드시 갚겠노라고 작심했었습니다. "숙군성은 후연의 수도와 가까운 곳에 있어 공격이 어렵습니다." "수군을 활용하라!" 광개토 태왕은 오랫동안 참고 준비해 온 치밀한 전략을 바탕으로 육군과 수군의 동시 출동을 결정했습니다. 그 무렵 후연은 고구려군에 맞서고자 ..
"연개소문을 다루기가 어려운데 좋은 방법이 없겠소?" "연개소문을 죽여야 합니다." "음, 어떻게?" "천리 장성 쌓는 걸 감독하라고 내보낸 다음 기회를 보지요." 서기 642년 가을의 어느 날, 고구려 영류왕과 대신들은 연개소문을 없애고자 비밀리에 논의했습니다. 당시 영류왕을 비롯한 대부분의 귀족이 중국에 대해 온건한 정책을 추구한 데 비해, 연개소문은 강경한 대응책을 주장해서 자주 마찰을 겪였습니다. 체격 당당하고 성격 강직한 연개소문은 좀처럼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그럴수록 국왕과 귀족들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고구려 수도 평양성 남쪽에서 대대적인 군사 사열식이 벌어졌습니다. 연개소문이 주관하는 자리였고, 주요 대신들이 빠짐없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연개소문은 이 ..